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커티스 르메이 (문단 편집) ==== [[일본 본토 공습]] ==== 중국 전선에서는 중화민국에서 출발하여 일본 본토를 폭격하는 임무를 맡았으나, 이러한 임무는 [[B-29]]로서도 너무 멀었기 때문에 별로 효과적이지 못했다. 다만 이번에도 일부러 만주에서 방공망이 가장 밀집된 곳으로 '''앞장서서 [[패스파인더|선두 기체]]에 탑승하여 출격하고'''[* 이시기 GPS도 없고 항법장치 수준도 낮아 작전지역에 정확히 진입하는 것조차 일이었던 폭격전대에 선두 기체, 패스파인더의 역할은 가장 중요한 길잡이 역할로 베테랑 파일럿이 맡았다. 당연히, 이 패스파인더의 첫 폭격지점이 부대의 타겟팅이나 다름없으므로 상대 대공포화의 제1 타겟은 선두기체 패스파인더이며 여기에 사령관이 타는 것은 정말로 목숨걸고 하는 짓인 것이다. 그러니 직속 상관인 [[헨리 아놀드]] 장군은 [[고만해 미친놈들아|미친 짓 좀 어지간히 하라고 당연히 반대했지만]], 르메이가 부탁하자 딱 한번만 허용해 주었다.], 대공포에 적중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기체가 멀쩡하고 요격기는 고고도로 못 쫓아오는 것을 파악하여 일본의 대공 능력이 B-29를 상대로 사실상 유명무실함을 입증하였다. 일본 육군 항공대가 충칭 등 중국 도시들에 소이탄으로 효과적인 공격을 하는 것을 보고 이것을 반대로 적용해 일본 도시에 써먹을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생각을 구상하던 1945년 2월 대일 폭격을 책임지는 [[제21폭격기사령부]][* 계통상으로 당시엔 대개 번호공군(제O공군)급 부대 예하에 전투 직종별(전투기/폭격기/수송기)항공사령부가 편제되어 있었지만 르메이가 있었던 제21폭격 사령부는 피직속 번호 공군이 아닌 한동안 미군 합참의 직할이었으며 6월 경 칼 스파츠 대장이 전략공군 사령관으로 현지 부임하여 상관을 맡긴 했다.]의 사령관에 취임해 대일 폭격을 총괄한다. 부임 직후 르메이는 처음에는 기존의 방식을 고수해봤지만 효율이 떨어지자 고공 정밀 폭격을 과감하게 포기하고 좀더 위험하지만 효과적인 저고도 [[소이탄]] 폭격으로 전환했다. 목재 가옥과 건물이 많은 일본 도시를 대상으로 한 그의 작전은 성공과 확실한 파괴를 가져왔다. 이전까지 미국 폭격기대는 고고도에서 특정 목표를 맞추는 정밀 폭격 작전을 시행했으나 그 효율은 그다지 뛰어나지 못했다. 르메이 장군의 전임 사령관인 육군 소장 [[https://en.wikipedia.org/wiki/Haywood_S._Hansell|헤이우드 핸셀]] 장군이 르메이 장군으로 교체된 것도 이런 작전 결과의 비효율성 때문이었다. 이는 작전 자체의 문제보다는 일본 상공의 환경에 대한 이해도 부족, 이를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기술력의 미비였다. 당시로선 최첨단 장비인 [[B-29]]와 [[노든 폭격조준기]]로도 일본 상공에서 부는 시속 몇백km에 달하는 [[제트기류]]를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핸셀 장군이 주장한 고고도 정밀 폭격이 그 효율성을 발휘한 것은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에야 가능했다. 이 때문에 르메이 장군은 정밀 폭격에 대한 [[비판]]을 가하면서도 핸셀 장군 본인에 대한 비난은 꺼내지 않았다.[* 핸셀과 르메이는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었고 영국에선 르메이가 핸셀 아래에서 일해보았기에 개인의 능력 문제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르메이도 처음 부임했을 때는 작전의 최적화를 통해 소티 수를 늘렸을 뿐 핸셀과 똑같은 고고도 정밀 폭격을 여러 번 시도하기도 했다. 실제로 핸셀은 전후에 그가 주장하는 전술을 눈여겨본 미 공군에 의해 재신임되어 전술 폭격에 대한 교리와 기술을 크게 발달시켜 지금도 미 공군의 주특기인 쑥밭 재배와 정밀 타격에 크게 이바지했고, 폭격기 사령관에서 짤린 당시에도 미 해군과 함께 효율적인 해상 수색 구조 시스템을 만들어 수많은 B-29 승무원들을 구해내는 등 능력이 매우 뛰어난 인물이었다. 핸셀이 주장한 정밀 타격은 일반적인 폭격의 정치적인 비용이 커진 21세기 이후에 미 공군의 정석으로 자리잡았다.] >There are no innocent civilians. It is their government and you are fighting a people, you are not trying to fight an armed force anymore. So it doesn't bother me so much to be killing the so-called innocent bystanders. > >무고한 민간인은 없다. 그것은 그쪽 정부와 함께 우리와 싸우는 민중들이고 우리는 무장한 적군하고만 싸우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소위 죄없는 방관자를 죽이는 것을 나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이때 나온 말이 바로 지금도 논란이 되지만 [[총력전]]의 본질을 꿰뚫는 '''"무고한 민간인은 없다"'''란 말. >According to General LeMay the Japanese model of production was intricate and complex. He described in his memoirs: >"In Japan they would be set up like this: they’d have a factory; and then the families, in their homes throughout the area, would manufacture small parts. You might call it a [[가내수공업|home-folks assembly line deal]]. The Suzuki clan would manufacture bolt 64; the Harunobo family next door might be making nut 64, 65, or 63, or all the gaskets in between. These would be manufactured right in the same neighborhood. Then Mr. Kitagawa from the factory would scoot around with his cart and pick up the parts in proper order." > >커티스 르메이에 따르면 일본의 생산방식은 복잡하고 밀착되어 있었다. 그는 회고록에서 설명했다. >"일본은 실제로 이렇게 되어 있다. 공장이 하나 있다. 인근의 가구들은 집에서 작은 부품을 제조한다. 그걸 가내수공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스즈키네는 64호 볼트를 제조하고, 옆집의 하루노보 가족은 64호, 65호나 63호 너트 그리고 기타 잡동사니를 만든다. 이웃에서도 똑같은 걸 제조한다. 그러면 공장에서 나온 키타가와씨가 손수레를 끌고 정해진 순서대로 부품을 가져간다." >---- >- [[https://books.google.co.kr/books/about/Mission_with_LeMay.html?id=khpCAAAAIAAJ&redir_esc=y|Mission with LeMay: My Story]] 1965, p. 384 현실적인 문제도 있었다. 일본 정부가 관동 대지진 이후 도쿄를 재건할 때 주거지에 군수품 공장과 그 공장에 하청 업체로 200명 남짓한 초소형 공장(공장 자동화라는 개념이 없이 완전 수동으로 돌아가던 시기라 이 정도면 정말 적은 것이다.)을 곳곳에 알박기식으로 건설해 공장과 주택간 거리가 10m도 안 되었고, 거기에 도쿄 시민을 노동자로 고용하고 그걸 모든 주거지에 비슷한 방식으로 설치했다. 도쿄만이 아니라 그 당시 일본 대도시 대부분이 저런 초소형 부품 공장을 대량으로 차려 놓아서 이런 공장이 국가 총 생산력의 절반을 감당했다! 미군이 이 공장을 모두 부수지 않으면 일본의 생산력이 떨어지지 않아 아군이 죽어나가고, 이를 부수자니 민간인 피해를 생각하면 고고도 폭격은 순도 100% 무유도 폭탄에 저 빌어먹을 편서풍의 제트기류로 집탄군(목표 적중률 50%) 이 분무기 수준이라 불가. 중저고도로 가자니 저 과부제조기 [[제로센|제로]]로도 요격이 가능하므로 아군 피해가 극심해 불가라는 환장할 상황인데,[* 가끔''' '급강하 폭격하면 되지 않아?' '''라고 묻는 사람이 있는데 급강하 폭격기는 FM보다 훨신 낮은 고도에서 투하해도 토치카 하나 맟출 확률이 50% 수준인 게 당시 세계 평균이였다. 이를 훨신 윗도는 일본과 독일 급강하 폭격대는 세계 최정상급이다. 문제는 이들조차 오폭날 때가 셀 수 없이 많으며 당시 일본을 폭격한 기종은''' '급강하 폭격=자살' 이라는 공식이 성립하는 4발 중폭격기 [[B-29]]라는 점이다.''' 급강하 폭격기는 [[Ju 88|극히 일부의 예외]]를 제외하곤 다 단발기라 항속거리가 짧기 때문에 일본까지 못 간다.] 그렇다고 폭격을 안 하면 아군이 죽어나가고 있으니 윤리적인 문제를 배제하면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최고의 전략적인 판단이 초소형 공장을 노동자째로 학살해 제거하는 것이다. '''적국 민간인을 죽이고 아군을 살리고서 '호전광 새끼'라 욕먹는다''' VS '''아군을 죽이는데 기여하는 적국 민간인을 살리고 '적국 민간인을 우리 국민보다 소중히 한 무능한 매국노'라 욕먹는다''' 라는 답이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물론 모든 사람이 이런 견해에 동의하는 건 아니라서 [[로버트 맥나마라]]는 이러한 르메이 장군의 관점을 비판하며 인터뷰에서 목표를 달성한다는 명분 하에 이루어지는 일방적인 폭격이 정당한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던진 바 있는데, [[에롤 모리스]] 감독의 다큐멘터리 포그 오브 워에서 직접 나온다. 그리고 르메이의 논리는 모든 민간인 학살에 적용할 수 있다. 농민을 죽이는 건 적의 군량미 생산력을 줄이는 거고, 아이를 죽이는 건 몇 년 뒤 보충될 병사를 줄인 거라는 식으로 말이다. 애초에 무고한 민간인은 없다고 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적용이다만, 그래서 민간인을 죽이는 게 옳은 거냐는 별개의 문제다. 역으로 진주만 공습같은 미국령이 공격받는 입장에서 적군이 민간인들을 죽였다면, 기습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는 것과는 별개로 민간인이 죽은 것은 잘못이 아니라고 판단했을지 의문이다. 총력전이라는 것이 국가 존망에 해당하는 전쟁에 국가의 인적 자원인 민간인 포함 모든 가용한 자원과 수단을 총 동원해서 싸우는 전쟁이라는 것을 상기하자. 하여튼 1945년 3월 10일의 [[도쿄 대공습]]으로 건물 26만 7천 채를 부수고, 도쿄 거주자 8만 5천 ~ 8만 9천명이 사망했으며 6만 6천 명이 부상당하는 등 일본 제국의 수도에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혔으며. 이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이 만들어낸 피해를 상회하는 기록이다. 진주만을 잊지 않는 미국인들에게 이때의 폭격 대성공은 그동안 확실하게 하지 못했던 일본에 대한 복수를 처음으로 받은만큼 돌려준 것이라 여론의 지지도 폭발적이었고, 정치권 또한 전쟁범죄 이런건 제쳐두고 국민이 이렇게 좋아하니 더하라고 밀어붙였으니 30억 달러 값을 하기 위한 일본 전역의 융단폭격작전에 탄력을 받았다. 물론, 도시 평탄화 외에도 규슈의 공군기지를 폭격해 본토에서 뜨는 가미카제를 차단하는 작전을 수행하기도 하고, 기아 작전으로 대량의 기뢰를 폭격기로 투하하여 일본의 주요 항구를 봉쇄[* 이것은 육군 항공대가 독자적으로 한 것이 아닌 해군 측의 요청이 들어와서 한 것이다. 당연히 르메이 장군은 이런 거 할 시간 있으면 도시에 대한 폭격이나 더 해야 한다고 툴툴댔다. [[구레 군항 공습]] 문서를 참조.], 일본 전역에 기아를 몰고 오기도 했다. 그의 지휘 하에 종전 직전인 1945년 7월 시점엔 일본 주요 도시의 60%가 잿더미로 변했으며, 일본의 공업생산량은 폭격 전 대비 40% 이하로 떨어졌다는 주장도 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Tokyo-kushu-hikaku.jpg|width=100%]]}}} || || '''폭격 전과 폭격 후의 [[도쿄]]''' || 중간에 일본의 대규모 카미카제 공격에 시달린 미 해군 원수 [[체스터 니미츠]] 제독의 요청으로 3월 중순부터 일본군 비행장 폭격을 지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르메이 장군은 이럴 시간에 차라리 공장이 숨어 있는 시가지를 불바다로 만드는 게 더 효과적이라면서 불평을 늘어놓았다. 물론 육군과 해군의 협의에 따라 니미츠 제독에게 르메이의 항공대 병력을 동원할 권한이 있었으므로 별 수 없이 임무를 계속 수행했지만 틈만 나면 이 임무에서 빠져나가려 발버둥을 쳤다. 르메이의 과격한 성향과는 관계없이 니미츠 제독은 태평양 전선의 미군에서 단 2명뿐(다른 1명은 맥아더)인 원수고 당시 일본 본토 폭격을 총괄했고 합참의 직할 휘하였던 르메이의 계급은 고작 소장이었다. 전쟁 전엔 불과 소령이었고 전쟁으로 전공을 세워서 고속 승진이 가능했지만 그래봐야 종전 직전의 최고 계급이 소장이었다는 것이다. 니미츠 제독과 비교해도 3계급 차이가 있다. 그가 3성 장군으로 진급한 건 베를린 봉쇄가 시작된 1948년이 돼서였다. 니미츠 제독은 통합군 전구사령관(군종과 국적을 초월하여 해당 전쟁 구역 전체를 총괄했다.)이었던 까마득히 높은 상관으로 오키나와 전투 시점에선 르메이보다 계급이 높았던 현지 지상군 총지휘관 버크너 육군 중장의 지상 진격이 미적거리자 해임할 뻔 했다가 봐준 사례가 있다. 이런 니미츠 제독의 절대적인 영향력 속에 계통상 합참과 아놀드 원수의 총애를 받는 르메이 소장도 그가 해군에게 억지로 떠맡은 임무에 대해서 직접 니미츠 제독에게 대들진 못하고 자신의 군종상 상관이었던 아놀드 원수에게 SOS를 요청해야 했다. 약 2주 정도 폭격을 마친 1945년 4월 1일, 르메이는 '이쯤 폭격했으면 일본 육, 해군 항공대 비행장들은 충분히 무력화됐다.'란 보고와 함께 작전 제외를 요청했다. 하지만 태평양 함대 사령부는 1주일 내에 대규모 카미카제 공격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기에 "우리가 봤을 때는 아직 멀었다."란 반응을 보이며 요청을 씹어버렸다. 이렇게 4월 중순까지 계속 실랑이를 벌이다가 결국 미 육군항공대 사령관 육군원수 [[헨리 아놀드]] 장군에게 쪼르르 달려가 안 빼준다며 투덜거렸고 이에 아놀드 원수가 해군참모총장인 [[어니스트 킹]]에게 비행장 폭격에만 치중된 폭격기 부대의 임무에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러자 킹은 "그러면 우리 해군은 철수할테니깐 육군 혼자 잘들 해봐."라고 답변하여 아놀드 장군을 침묵시켰다. 결국 기대와는 달리 '21폭격기 사령부의 임무는 해군에게 협조하여 일본군 비행장을 폭격하는 것.'이란 명령서가 다시 한 번 내려오면서 더 이상 빠져나갈 구석이 없어졌다. 결국 이 임무는 5월 11일까지 계속되었다. 임무가 끝난 직후 니미츠 제독은 궁시렁대면서도 폭격 임무를 완수한 르메이 장군에게 감사 서신을 보내 치하했다. 여담으로 한 전후 연구에 따르면 미 육군 폭격기가 허구헌날 비행장을 두드려대는 바람에 실제 일본 육해군이 확보했던 항공기에 비해 출격한 항공기의 수가 급감하여 카미카제 작전의 효율까지 덩달아 떨어뜨린 효과를 낸 것으로 분석하기도 했다. 사실 그 자체도 요격기 지상출동을 막았으므로 굳이 P-51이 호위로 안떠도 규슈 지역을 고루 평탄화할 정도로 폭격하기 수월해진 효과도 있었다. 비행장을 폭격하는 와중인 4월에는 기아 작전(Operation Starvation)의 일환으로 폭격기 일부를 차출해 항만지역에 [[기뢰]]를 살포하라는 명령도 떨어졌다. 이 역시 직접 폭격이 아니어서 르메이 장군의 입맛에는 안 맞았지만 [[까라면 까|위에서 시키는 데 별 수 있나]]. 하여튼 그렇게 한 달동안 기뢰 1만 2천여개를 살포했는데, 그 결과 약 100만톤에 달하는 일본 수송선단을 격침시키고 본토로 들어가는 원자재 수송량을 80%나 잘라버렸다. 또한 연안 해운이 마비되니 여기에 의존하는 일본의 국내 교통망도 덩달아 마비되는 효과를 낳았다. [[도쿄 대공습]]에 가려지긴 했지만 전후 분석 보고서는 이 기뢰 살포가 일본 본토 공격 도중 가장 가성비가 뛰어난 작전이었다고 적고 있다.[* [[http://aupress.maxwell.af.mil/digital/pdf/book/b_0020_spangrud_strategic_bombing_surveys.pdf|United States Strategic Bombing Survey]], 1946, p. 73] 이 작전으로 일본 전역에서 민간인 30만 여명이 아사(...)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미군 장성들 중에서 민간인을 죽인 숫자로는 가장 높은 것이다. 전후 분석 결과로는 해상 수송을 차단한 것 역시 효율적이었을 것이란 평가도 나왔다.[* [[http://aupress.maxwell.af.mil/digital/pdf/book/b_0020_spangrud_strategic_bombing_surveys.pdf|United States Strategic Bombing Survey]], 1946, pp.90~92] 한편, 르메이의 평전 ''LeMay: The Life and Wars of General Curtis LeMay''을 쓴 워런 코작이라는 [[기자]]는 이렇게 일본 전역의 공업 기반을 쑥 재배지로 만들어버린 덕분에 [[몰락 작전]]을 굳이 벌일 필요가 없을 정도로 일제의 공업 생산량이 급락해서, 원자폭탄과 함께 수십만 명을 죽였지만 결국 수백만 명의 목숨을 살린 비정하지만 현실주의적인 결정이었다고[* Kozak, 2009] 한마디로 그를 옹호하는 주장을 했는데, 사실 이 분야 전문가 중 한명인 존 키건은 일본의 항복을 이끌어 낸 수단으로 평가받는 건 도쿄 대공습이 아니라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 투하]]로 본다.[* 존키건,2007,864-867 존 키건 저, 류한수 옮김, 2차 세계대전사, 청어람미디어, 2007, 864-867쪽. 다만 소련의 만주 작전도 같이 언급했다.] 한편 원폭 투하 직전까지 커티스 르메이는 상부에게 "왜 히로시마, 나가사키, 고쿠라, 교토, 니가타는 폭격 목표에서 제외시키는 거요?"라며 줄기차게 항의하고 있었다. 저 도시들은 바로 원자폭탄을 투하할 최종 후보지였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배제했던 것. 즉 커티스 르메이와 같은 고위 장성조차 원폭 계획 자체를 몰랐다는 얘기이다. 심지어 권력 2위였던 [[해리 트루먼]] 부통령조차도 루즈벨트가 사망하고 대통령직을 승계한 뒤에야 원폭 계획의 내용을 접할 수 있던 최고 기밀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